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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잡담] 사이코패스내친구

개미핥기 개미핥기
83 7 8

뜬금 없는 이야기지만 언젠가 친구에게서 싸이코패스로 의심받던 적이 있더랬죠. 딱히 주변 공감에 문제를 격거나 감정의 결여를 감지해서가 아니라 대화중에 우스갯소리로 나온 초딩시절의 음악감상문의 추억 때문이었습니다.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를 들려주고 감상문을 적어 제출하는 평범한 시험(이하 사육제)으로 평범히 잊혀졌어야 했지만 음악선생의 절망적인 평점으로인한 충격으로 거절당했던 망각이었죠. 8절 갱지를 빼곡하게 채웠던 절망의 감상문을 간단히 요약하면 대략 이러했습니다.

 

처음엔 조용하던 소리가 커졌다.

조금 줄더니 다시 커졌고

보통의 소리로 얼마간 유지되다가

(중략 x3 ...)

다시 커지더니 점차 줄어들어

들리지 않게 되었다.

 

- 끝

 

오해를 줄이기 위해 일러두자면 여기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었는데, 해당 사육제 몇 달 전 학부모면담에서 지나치게 집중력이 떨어지고 산만하여 다른 친구의 학업을 방해한다는 주의를 2년 연속으로 받고서 불필요한 부모의 걱정을 사버린 탓인지 어쩄건 담임에게 보고할만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던 부모는 저를 병원에 데려가 당시 진단개념조차 흐린 ADHD의 비약물치료방법에 관한 상담을 받고서 못 미더운 의사의 권유로 '아이를 종이접기 협회에 보내야겠다'는 멍청한 결론에 도달하였고 이후로 저는 매주 주말이면 협회에서 운영하는 교실에서 훗날 TV출연으로 유명해졌던 김모_아저씨(?)에게 수업을 받게되었죠. 그게 발단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종이를 접고 있었습니다. 접고, 접는 행위를 탐미하고, 배수단위로 정확히 일치해 맞물리면서도 두께로인해 조금씩 어긋나 용인되고마는 가여운 현실의 세계에 매료되었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접고 또 접기를 전파했으며 할멈을 졸라 각종 종이들을 닥치는대로 수집하였고 저에 목표는 종이접기 협회장이었죠. 저는 거기 푹 빠져있었답니다. 꿈과 바램이 표현되고자 하는 의지를 머금은 형태로 결실을 맺어 방을 채우기 시작했죠. 그리고 곧 버려졌습니다. 레퍼런스 여덟 페이지에 달하는 초고난도 모빌을 만들어도, 19세기 후반의 화려한 장식을 현대적인 이중모듈구조로 재해석한 입면체들도, 그저 아이가 교사에게 주의받지 않을 만큼만 얌전해지길 바라던, 최소한의 조치를 취하고 교사가 더는 왈가불가하지 않길 원하던 부모에겐 무쓸모의 종이쪼가리일 뿐이었죠. 버블경제 시절엔 보통 그랬습니다. 당연하지만 3개월 간의 종이접기 수업이 꿈결처럼 끝이나고 다음 시즌 신청을 받는다는 소식도 조용히 묵살되었죠. 다른 형태의 결실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들이 제게 갈구하던 집중력!!

 

하여 그날의 어두운 음악실에서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었더랬죠. 다만 너무 시야가 좁고 멍청한 나머지 사용법을 몰랐을 뿐. 잠시라도 놓칠세라 바쁘게 글씨를 휘갈겼던 이십여분간의 음량추적일지는 수십년이 지나 아방가르드 싸이코패스 농담으로 승화되었지만 조금 진지하게 추억하자면 그 날의 사육제가 말 그대로 사육제(Cannibal)의 시간이었음을 실감할 때가 있고, 이따금 주변에서 이와 닮은 아직도 멍청한 어른이를 발견할 때마다 아련한_혐오를 느끼는 자신이 한심할 때가 있답니다. 추석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사육제가 이런것 뿐이네요.

 

부디 아무도 잡아먹지 않는 기름진 추석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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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 박지훈님 포함 7명이 추천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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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image 1등

그러니깐...종이접기 장인이시군요?

20:50
3일 전
profile image
개미핥기
ㄷㄷㄷㄷ 일본에서 흔히 표현하는 사축 직원 ㄷㄷ
20:52
3일 전
profile image
쏘핫
아뇨
종이접기 신이었습니다
내가 신!
쉰!
20:56
3일 전
profile image 2등
종이접기...전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ㄷㄷㄷ
21:10
3일 전
profile image
Software
그래봐야 물건을 구입하면 설명서를 정독하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ㄷㄷ
21:15
3일 전
profile image 3등

적성이 아쉽게 뭍혀버렸군요. ㄷㄷ

21:42
3일 전
profile image

ㅋㅋㅋㅋㅋㅋ....

웃으면 안되는데... 역시 멀리서 보는 남의 인생은 코미디가 맞는듯요. 

완전 영화 시나리오임요. 꼭 한번 도전을!

 

거지같이 시시한 세상을 진지하게 받아낸 어느 작은 소년의 성장기임요. 훌륭하게 받아내셨습니다. 

21:57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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