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캣 EVO 청음 후기

 7월 말에 크게 다친 아킬레스건의 봉합이며 깁스를 마침내 풀고난 후 나흘째 되던 날, 오늘은 수요일이니만큼 맘껏 청음을 하고 가고자 한 달만에 사운드캣을 방문했습니다. 당연히 에티모틱의 신작 EVO를 가장 먼저 청음할 생각이였죠.

 초코라떼 하나 주문하고 바로 청음 공간으로 이동해서 EVO를 딱 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딱 집어드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케이블이 '고르디우스의 매듭'마냥 몹시 엉켜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굵기가 너무 가늘어서 풀기가 더욱 곤란해 보였죠. 아니나다를까 제 예상대로 이걸 푸는 데 대충 10분을 썼습니다.

 엉켜있던 케이블을 겨우 풀고 제 귀에 유닛 착용을 해 보았습니다. 처음엔 이것이 에티모틱 최초의 오버이어형이라 이전 제품과는 달리 유닛이 길쭉한 형태가 아니었고, 부피도 꽤 커 보여서 착용이 잘 안 될까 걱정을 했었는데, 무선이어폰 착용하듯이 일단 유닛을 귀에 걸치고 돌리다 보니 착용이 잘 되더군요. 

 문제는 장착된 이어팁이 2단팁이 아니라 프로스트팁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제가 mk5를 집에다 두고 왔었기 때문에 클리어팁으로 갈아 끼는 일 없이 그냥 착용을 했는데, 깊숙이 착용하면 귓구멍이 더 아팠고 이도를 완벽히 막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이도 입구를 전부 막을 수 있을 깊이로 착용을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착용하면 치찰음이 더 심해질 수도 있겠지만 당시엔 소리 성향이 어떻게 되는지는 자세히 분석할 생각은 전혀 없어서 큰 문제라고 생각은 안 합니다. 더 궁금했던 건 해상도, 공간감이었으니까요.

 성향은 ER4XR보다 저음이 다소 강조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EVO의 그래프가 하만타겟과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체감상 하만타겟과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쯤 되니 에티모틱이 아예 하만타겟을 추구하는 오디오필에게 어필하기 위해 EVO를 출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간감은 ER4보다 향상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어폰인데 헤드폰을 끼고 있다는 착각이 잠깐 들었죠. 물론 공간감 하면 대형 오페라홀 느낌이 났던 포칼 유토피아가 가장 먼저 생각나긴 하지만 당연히 그 정도까진 아니고 재즈클럽과 같은 소규모 공연 공간에서 연주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존의 ER4는 녹음실에서 연주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공간감이 너무 없이 들렸었죠.

 반면에 공간감을 제외하면 해상도, 분리도에선 기존 ER4 시리즈와 큰 차별점을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ER4는 겨우 BA 한 개로 우수한 해상도, 분리도를 구현했는데 EVO는 3개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해상도, 분리도가 ER4와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 만큼 ER4가 명기라는 생각도 들면서, 이미 에티모틱 제품의 해상도와 분리도가 더 좋아질 수 없는 일정 수준으로 수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따라서 제 생각에는 공간감에 크게 상관없어하시는 분들은 수십 만 원 더 들일 필요 없이 ER4로 종결하시면 될 것 같고, 헤드폰 느낌을 원하시는 분들과 순수 DF타겟보다는 하만타겟을 더 좋아하시는 분들은 EVO를 구매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순수 DF타겟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냥 ER4SR 쓰셔야죠....

 아무튼 제가 EVO를 계속 청음하고 있었는데 6시쯤 돼서 점원분께서 오시더니 마감 시간 거의 다 됐다고 하시더군요.... 수요일에는 밤까지 청음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왜 그런지 점원분께 여쭤보려 했다가 문득 최근 적용된 거리두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 그냥 바로 자리를 정리하고 나갔습니다. 정리할 때 진열된 ER4SR에 끼워진 구형 회색팁을 뒤늦게 발견한 건 덤이었고요.... 뭐, 이미 다 끝났으니 다음 기회에 클리어팁까지 다 챙겨서 다시 방문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