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델릭스 T71에 대한 잡담
한동안 새로운 음향기기 구입이 뜸했습니다. 간혹 구입한다해도 이렇다할 감흥을 느끼지 못해 따로 글을 남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꼭 한마디 하고 싶은 제품을 만났습니다. 큐델릭스 T71입니다.
큐델릭스에 대한 이야기는 5k 출시 때부터 꾸준히 들어왔습니다만, 딱히 구매욕이 당기지는 않았습니다. 첫째는 그 투박한 외관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 전에 이미 제가 허다한 블루투스 리시버 및 꼬다리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제품은 7.1채널을 지원한다는 얘기를 듣고 큰 기대 없이 재미삼아 하나 구입해봤습니다. 일반적인 DAC보다는 다채널 지원이 제 직업상 (만약 기대에 다소나마라도 부응한다면) 더 효용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습니다.
며칠 전 제품을 수령하고 메뉴얼을 훑어보고 간단하게 들어봤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냥 감탄만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간에 걸쳐 하나하나 만져보고 집중적으로 테스트했습니다. 그리고 경악했습니다.
세팅의 방대한 범위와 단순히 잡다하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용했을 때 실제로 반응하는 세밀한 차이, 무지막지한 오토 EQ 프리셋 리스트, 넉넉히 뛰어난 사운드 퀄러티와 기대를 한참 상회하는 다채널 효과까지, 이건 단순히 충실함이나 집요함을 넘어서 (실례되지 않는 표현이길 빕니다만) 광기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수준이더군요.
자본주의적 기업가나 엔지니어가 아니라, 자기신념과 고집으로 가득찬 장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 교과서에서 읽었던 방망이 깎던 노인이 떠올랐어요. 이게 어디 돈벌겠다는 기업가의 자세겠습니까, 내가 만들고 싶은 물건 제대로 만들어 내겠다는 장인의 고집이지.
다른 분도 글에서 언급하셨지만, 패키지 품질 얘기가 나왔을 때, 딱히 친환경을 의도한 건 아니다, 원가 절감을 통해 더 좋은 품질을 제공하려고 그런거다, 는 취지로 시크하게 답변하시던 모습이나, 과거 문제가 됐던 고객응대 이슈 같은 것들도 이런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나 싶더군요.
큐델릭스와 같은 기업이 지금과 같은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람직한 기업의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완고하지만 완벽함과는 거리가 있고, 다소 불친절하고 복잡하고, 어딘가는 결여됐고 어딘가는 지나칠 정도로 과잉이죠.
하지만 세상에 이런 회사 하나쯤은 있어야 사람 사는 재미가 있지 않나 싶어요. 꼭 살아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성하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 맘껏 하실 정도로는 돈을 벌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수준의 제품을 계속 만든다면 앞으로 저는 큐델릭스에서 나오는 제품은 무엇이든, 설사 제게 하등 필요 없는 여성용 청결제라도 무조건 구입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댓글 10
댓글 쓰기사진으로 보다가 직접 받아보니 그래도 각오했던 것보다 제법 만듦새가 괜찮더군요. 큐델릭스가 유독 사진빨을 안받나봐요. 아니면 기대치를 너무 낮춰놨기 때문이던가.
저도 바로 작성자님과 똑같은 생각에서 해당 회사를 응원하고 있어요. 제가 하고팠던 말, 받았던 느낌을 보다 뚜렷하고 와닿게 남겨 주셨네요. 세상에는 고객이 바라는 제품을 연구해서 내놓아 히트치는 보다 오늘날에 걸맞는 기업도 있는 반면 자기들이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내놓은 제품으로 소구하는 보다 구식이지만 왠지 정감가는 기업도 있죠. 큐델릭스가 후자인 것 같습니다. 다만 오래 살아남으려면(그래서 이런 흥미로운 제품을 계속 더 내놓으려면) 조금은 시장친화적인 테크닉도 하나둘 구사해 가기를 바라봅니다.
아으~ 궁금하다으...ㅡㅅㅡ
여성용 청결제라도 구입하시겠다 하실 정도로 큐델릭스에 무한신뢰를 보내고 계시는군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