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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스포) 웃는 남자

Plamya Plam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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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를 읽고서, 총균쇠를 읽을 차례였는데...

정직하게 말해서 화려한 장정에 이끌려 이 책, '웃는 남자'를 집어들었습니다.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 드 파리가 아닌 웃는 남자?

 

레 미제라블은 중학교 시절 반쯤 강제로 읽던 세계 고전문학 중에 섞여 있었으니 정말 오래 전에 읽었고, 노트르담 드 파리는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된 그림 동화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접했으니 저는 사실 위고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는데, 아마도 제가 읽은 레 미제라블은 축약판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문체로 글을 썼는데 그 시절의 제가 중간에 집어던지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아래부터는 지루한 독후감상문입니다. 

 

 

 

1.

문장 하나하나는 매우 간결하지만, 묘사가 과할 정도로 치밀합니다. 박경리의 토지를 위고가 썼다면 아직 완결까지는 까마득했겠네요. 문장마저 만연체가 되었다면 마르셀 프루스트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으면서, 파리 생활을 꽤 했던 헤밍웨이가 그런 분위기에 질려 그런 문체를 탄생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시대상이나 귀족사회에 대한 묘사는 '장광설'이라고들 표현하기도 하던데, 그 정도까지 과하다고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이 번역본에 대해서는, 특별판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초반부에는 여러 곳 오탈자들이 발견되어서 과연 제대로 된 번역인가? 하는 불신도 생겼지만 본문 자체가 워낙 랩하듯 은유를 쏟아내고 있는지라 그냥 맘 편히 먹고 읽었습니다.

 

2.

위고를 셰익스피어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곤 하는데, 저도 동의하고 싶습니다. 

주인공들인 그윈플렌, 데아, 우르수스에는 자신을 상당히 이입하면서 읽는 독자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그랬고요. 시대상 역시 특정 연대의 영국 귀족 사회를 중점적으로 묘사하고는 있지만, 특권계층에 대한 반감이라는 건 어느 시대에나 대중 속에 깔려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서민 사회에 대해서 세밀한 묘사는 도입부를 제외하면 없는 데 가깝고, 주로 우르수스를 통해서 불문부답 복종해야하는 귀족과 철저히 구분된 불합리한 위치를 보여주면서 대조하는데 그치는 듯합니다.

 

3.

저는 그윈플렌과 데아로부터 카지모도와 에스메랄다를 강하게 의식했습니다.

하지만 그윈플렌과 데아는 세상의 더러움에 전혀 물들지 않은 순수한 인물들인데, 변형되고 일그러진 얼굴을 가졌지만 고귀한 영혼을 가진 그윈플렌과 천사의 외모를 가졌으나 눈이 먼 데아의 조합은 카지모도와 에스메랄다보다 더 추상화된 가치를 입힘으로써, 위고가 보여주고자 하는 더 깊은 주제들을 위한 도구로 설계된 것 같습니다. 주인공들 중 가장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우르수스조차 권력 앞에 굴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윈플렌과 데아를 향해서는 설명하기 어려울만큼 순수한 박애와 부성애를 보여주는데 이 세 사람에 대해서는 위고의 과할 정도로 세밀한 묘사 덕분에 영상화 되었을 때 재해석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러한 캐릭터들이 대변하는 내면적 가치의 차이가 결국 디즈니로 하여금 웃는 남자보다는 노트르담 드 파리를 선택하게 만든 게 아닐까 싶습니다.

 

4.

반면에 주요 주변인물인 조시안 여공작, 데이비드 더리모이어 경, 바킬페드로는 철저하게 제한된 역할만을 가지는 듯 보입니다. 덕분에 상당한 재해석의 여지도 있는 것 같고요. 영화에서는 조시안의 경우 상당히 많은 추가적인 설정이 가해진 것 같던데, 위고가 이 캐릭터를 묘사하는 데 할애한 지면에 비해, 그윈플렌에게 미치는 영향은 데아의 안티 테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고, 중반부 퇴장 이후로는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캐릭터의 퇴장 이후로 극이 절정부를 향해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네요. 더리모이어 경 같은 경우도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불행을 초래한 음모의 중심에 놓이지만 원작에서는 그 정도로 주인공과 숙명적으로까지 얽힌 존재로 보이진 않습니다. 바킬페드로는 상당히 편의적으로 설계된 캐릭터라고 생각되는데, 이 정도로 순수한 악을 품은 캐릭터는 극의 전개에는 필요하지만 과연 어떤 가치나 시대상을 대변하는가? 하는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입니다.

 

5.

정말 철저하게 비극입니다. 영화나 연극의 데아와 그윈플렌이 별이 된다는 표현은 정말 팬 픽션에 가깝고, 두 사람의 죽음으로 우르수스와 호모조차 십수년에 걸친 환상일 뿐이었던 행복을 잃어버립니다. 위고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필로그에서 카지모도와 에스메랄다에게 구원을 주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나마도 없습니다.  우르수스와 호모는 두 천사와 살아가던 경험과 기억이라도 남지만, 세상은 그 마저도 품지 못하는 결말이 비극적이네요. 특히 2장 6부는 읽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비정함을 가장하지만 결국 부성 앞에 온순해져 발악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우르수스나, 결국 스스로를 죽음으로 이끄게 되는 상심을 겪는 데아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잠깐 책을 덮고 월드 오브 워쉽을 한 판 하고 왔습니다(그리고 졌습니다).   

주변인물들마저도 굳이 말하자면 비극적인 결말을 맺습니다. '톰짐잭' 더리모이어는 마지막에 거의 이판사판으로 일대다 결투를 신청하고서 과연 살아남았을까? 싶고, 조시안은 자신이 잇기로 한 유산 승계의 조건을 만족시켜줄 두 남자가 모두 사라졌으니 결국 바킬페드로와 앤 여왕을 행복하게 해줄 뿐일 것 같습니다.

 

6.

데아와 조시안이라는 두 캐릭터의 대비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조시안이라는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인 악역인데, 위고는 이 캐릭터만을 위해서 귀족사회의 묘사 또한 상당히 투자할 정도로 공을 들입니다. 너무 쉽게 느껴지는 퇴장은 영화 제작자들로 하여금 상당한 재해석을 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정말 입체적인 악함을 대변하는 캐릭터인데, 대조적으로 데아는 너무 순수한 영혼이라 정말 초라할 정도의 분량만 사용되고 있고요. 하지만 데아에는 그 이상의 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데아의 상실이 그윈플렌에게 의미하는 바가 더 크고 비극적으로 제시됩니다. 조시안과의 우연한 만남은 그윈플렌에게 있어 미지였던 유혹이고, 이 캐릭터로 인한 그윈플렌의 정신적, 육체적 오염은 결국 데아를 잃어버리는 결말을 필연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실 초반부의 과할 정도로 어지러운 묘사는 조시안과 그윈플렌의 만남을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들고, 극의 비극적 결말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한 작가의 설계라고 생각합니다.

 

 7.

마지막 장의 그윈플렌과 데아의 짧은 재회는 두 사람의 비극적 결말에 그나마 극적으로 허용된 작은 구원인 동시에 더욱 확실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연출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를 보았습니다. 이 또한 위고가 추구하고 설계한 보편성이 의도한 바 대로일까요? 그렇다면 저는 감탄할 수 밖에 없네요.

그리스 신화에서는 에우리디케가 유혹에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오르페우스가 그녀를 잃었지만, 웃는 남자에서는 그윈플렌이 조시안의 유혹과 귀족사회의 환상에 잠시 혹해 타락해버린 탓에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템즈강이라는 삼도천에 스스로 몸을 던집니다. 여기에서 우르수스는 그저 무력하게 방관하는 카론일 뿐이네요. 저도 사실 영화 제작자들처럼 두 사람이 별이라도 되었기를 바랍니다.

 

 

 

 

이 외에도 정말 떠오르는 게 많지만...

저 정도만 적으려고 합니다. 금요일 저녁에 밥 먹고 잠시 서점 갔다가 가벼운 마음에 오랜만에 소설을 집어들었는데,

정말 어제, 토요일 하루는 일하는 시간 말고는 정말 이 책만 읽은 것 같습니다.

이래서 서점이 위험하고, 책이 해롭습니다.

 

 

 

Plamya Plamya
21 Lv. 9432/9680EXP

Source/AMP

Schiit Asgard & Bifrost Gen. 1  |  Fostex HP-A4  |  Lotoo PAW S1  |  FiiO K3, K7 BT
 
 

DAP

 Astell&Kern AK100II, SR25  |  COWON Plenue 2

 

IEM

Moondrop A8  |  Sony IER-Z1R  |  DROP×EE Zeus XIV, DROP×JVC HA-FDX1  |  Thieaudio Monarch MK. I  |  Fearless S8Z  |  Unique Melody 3DT  |  Truthear HEXA 
 
 

Headphones

Beyerdynamic  T1 Gen. 1, T70,  DT-880 Edition, DT-990 Pro  |  Sennheiser HD800S, Momentum 4  |  Sony MDR-SA5000  |  Audio-Technica ATH-W1000  |  Philips Fidelio X2HR  |  Focal Bathys
 
 

Speaker

Bose Music Monitor  |  Kanto YU2+SUB8, Y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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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베어 센티베어님 포함 9명이 추천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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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image 1등
저도 간결체 잘 쓰고 싶습니다...ㅋㅋㅋ

예전에 소설쓰고 싶어서 만연체 쓰던게 습관이 돼서...

지금은 글 쓰려면 자꾸 만연체가 나오더라구요
11:31
24.06.16.
profile image
Plamya 작성자
LiNee
간결체는... 논문을 많이 쓰시면 숙달이 됩니다ㅋㅋ
11:38
24.06.16.
profile image 2등
저 두꺼운 책을 하루 반만에 읽으시다니..
정신력이 고갈된 저에게는 불가한 일이네요. 크흑
영화 한 편도 끝까지 못 보고 삽니다.
11:41
24.06.16.
profile image
Plamya 작성자
JNK
아, 어제 하루 읽었으니 하루만에 읽었습니다.
책이야 뭐 정신력을 소모하기 보다는 차 홀짝거리며 힐링하는 게 목적이니까 별로 피곤하진 않아요.
다만 차만 마시면 다행인데, 다과가 끼어들기 시작하면...
11:45
24.06.16.
profile image
Plamya
오운완이 아니라 오독완이시군요. 허허
11:46
24.06.16.
profile image 3등
저런 두꺼운 책을 하루만에.. 대단하십니다.
13:54
24.06.16.
profile image
Plamya 작성자
숙지니
자제력이 부족해서...
간만에 재밌는 소설책을 읽었더니 시간 가는 걸 잊었습니디
18:59
2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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