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 청음기와 몇 가지 생각들
며칠 전 오랜만에 청음샵을 찾았습니다.
잠실에 갈 일이 있어, 그 중간에 먼저 강남 청음샵 두 곳을 들르는 동선을 짰습니다.
정말 청음은 할 때마다 느낌이 다릅니다. 제 귀를 믿을 수 없네요.
청음을 통해 리시버의 성향이나 느낌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지만, 짧은 시간의 인상이라 완전히 신뢰하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청음샵 방문기와 일부 기기 중 청취 소감을 조금 적어보고자 합니다. DT990 PRO를 만족하며 사용중인 점이 글 내용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사용한 DAP는 LG G7+입니다.
1. 논현역 근처 청음샵
역에서 매우 가까워(출구에서 1분도 안 걸리는 거리) 찾아가기 편합니다.
대체적인 느낌은 청음하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음할 수 있는 리시버는 많습니다. 그런데 가게 면적이 좁습니다. 사람이 조금만 들어와도 북적북적합니다.
그리고 대로변에 있습니다. 주변소음이 꽤 잘 들리는 편입니다. 이번에 갔을 때는 주변에 도로공사를 하여, 굴착소리도 간헐적으로 들리더군요.
게다가 이번에는 스피커 청음을 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스피커로 빵빵하게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으니 헤드폰 소리가 들리지를 않더군요. 그분들 가시기까지 한 15분 정도는 헤드폰을 장식으로 끼는 느낌이었습니다.ㅎㅎ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청음 가능 목록을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기기들을 들어 봤습니다.
그 중에서 좀 나은 조건에서 들을 수 있었던 리시버들만 정리해 봤습니다.
*DT 1770 : 악기들도 또렷하게 들렸고, 각 파트가 풍성한 느낌이었습니다. Michael Jackson의 Rock With You 시작 부분 신디사이저 파트를 다른 헤드폰들과 비교했는데 확실히 신디사이저의 질감이 잘 느껴지더라고요. 악기 소리가 좀 더 두텁게 들린다고 해야할까요. 붕붕대거나 흐린 느낌을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마치 글꼴을 굵게 처리한 것 처럼 말이죠. 또렷하면서 부피감이 좀 더 있는 느낌으로 들렸습니다. 공간감은 제가 가진 DT990이랑 큰 차이는 못 느꼈습니다. 이어서 DT770도 들어봤는데, 상위 기종을 먼저 들어서 그런지 와닿는 느낌은 적었습니다.
* AEON FLOW OPEN : 사실 가장 궁금했던 헤드폰 중 하나였습니다. 제 지난 글에 다른 유저분께서 추천해 주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느낌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해상도가 높고 악기들이 잘 분산되어 배치된 느낌을 상상했는데요. 우선 악기 소리가 선명하지 않은 느낌이었고, 전체적으로 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뻣뻣하고 두꺼워 보이는 흰색 부직포가 이어컵 안쪽에 있길래 이것 때문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더 선명한 소리를 위해서는 DAC/앰프가 필요한 건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 99Classics : 단지 디자인 때문에 들어 봤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선명도는 조금 아쉬운 느낌이 있었지만 거슬리진 않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좋았습니다. 웬만한 음악은 즐겁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중 헤드 밴드가 조금 타이트한 느낌이나 끼고 나면 괜찮았어요. 다만 헤드폰을 벗을 때 두개의 헤드밴드가 겹쳐지는 사이로 머리카락이 껴서 몇 가닥씩 빠지더라고요. 머리카락이 끼지 않게 하려면 아래 쪽 밴드를 위로 힘껏 잡아당겨 헐렁한 상태에서 벗겨야 할 것 같은데, 벗으면서 동시에 하려면 불편할 것 같습니다.
다른 것들도 많이 들었으나 중요한 것만 정리했습니다. 확실히 청음 순서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디오테크니카의 M50X도 오랜 관심 품목 중 하나인데요. 저번에는 청음 초반에 먼저 듣고, 굉장히 좋은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그러고 상위의 다른 클로즈드 헤드폰을 들었는데 그리 큰 차이를 못 느꼈거든요.
이번에는 DT1770 과 99Classics를 먼저 듣고 M50X를 거의 끝무렵에 들었더니 별 감흥이 안 오더라고요.
2. 압구정로데오역 근처 청음샵
역에서 그리 멀지는 않으나, 150미터 정도는 걸어 갸야 해서 더운 여름날에 조금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청음 조건은 위 가게에 비해 훨씬 좋습니다. 좁은 길가라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 소음이 덜하고요.
스피커와 이어폰/헤드폰 청음 공간이 떨어져 있어서 방해 받을 일은 없었습니다. 사람은 아주 많았지만 테이블이나 의자가 잘 마련되어 보다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 HD 800S
이 제품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거의 바로 HD 800S를 청음했습니다. 몇달 전에도 같은 공간에서 한번 들었는데 지난 번 청음과는 180도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너무 공간이 넓어서 이질적이라고 표현했었는데요. 이번에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악기들이 다 제자리에 잘 배치된 느낌이었습니다. 악기 하나하나 아주 또렷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화가 너무 자연스러웠습니다. G7에서 볼륨확보도 충분히 되었고요. 볼륨을 줄이거나 키우면서 비교할 때도 그 느낌이 균일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일부러 악기 편성이 많은 교향곡들을 들었는데, 확실히 다른 헤드폰에 비해 좋더라고요. 예를 들어 동시에 서너개 정도 현악 파트가 서로 다른 선율을 연주하는 부분에서, 다른 헤드폰들에선 선명하지 않은 파트가 이 헤드폰에선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혹시나 편곡이 단출한 곡에서는 휑하게 들릴까 싶어, 빈지노의 Fashion Hoarder를 틀어봤죠. 그런데 자연스럽게 꽉찬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난 번엔 제가 뭘 들은 걸까 고민하게 되더군요 ㅎㅎ 스탠다드 재즈도 마찬가지로 아주 좋게 들렸습니다. 10분 정도 각 장르 별로 쭉 들어봤는데 다 좋게 들리더군요. 클래식에만 좋다는 선입견은 오류였나 봅니다.
다만 다른 헤드폰들에 비해 패드가 얇아서 완전히 머리와 밀착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본 패드가 금방 납작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 Empyrean
먼저 99Classics를 듣고나서 괜찮았던 터라 이 제품에도 관심이 갔습니다. 기본적으로 아주 좋았습니다. 전체적인 균형도 좋았습니다. 클래식에서는 HD800S에 비해 조금 아쉬었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습니다. 이어컵이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두꺼워 보이는데 착용감은 편했습니다. 또 99Classics처럼 이중 밴드 모양이긴 하나, 착용방식은 다르더군요. 머리에 닿는 밴드를 이어컵 바깥쪽에 달린 기둥(?)으로 높이를 조절하는 거라, 머리카락이 낄 위험이 없더라고요. 고급스러운 디자인도 괜찮았지만 가격표 앞에서는...
* LCD 4 / LCD 4Z / LCD 2
직원분께 요청하여 케이블을 연결하고 들어봤습니다. LCD 4는 G7에서 볼륨확보가 원활하지는 않았습니다. 최대볼륨의 90%정도는 되어야 들을 만한 크기가 되더라고요. 이어서 LCD 4z를 연결해 봤고 이건 볼륨 확보는 되었지만 임피던스에 비해서는 소리가 크리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번 방문 때 LCD2를 듣고 괜찮았던 느낌을 받아 상위 제품을 들어본 건데, 이번에는 느낌이 사뭇 달랐습니다. 예전에는 저음이 힘이 있고 관악기 소리가 풍성하게 느껴졌었거든요. LCD4 두 제품이 제 예상과는 달라 다시 LCD2를 들어봤습니다. 생각보다 악기들이 또렷하지 않은 느낌이었고 중간대역이 좀 부풀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클래식 곡에서 악기들이 깔끔하게 나뉘어 들리는 느낌이 들지 않더라고요.
이외에도 여러 제품을 들어봤으나 들을 수록 피로가 쌓여 특별한 인상이 남는 게 없었습니다. 데논의 제품들 9200이나 7200도 자연스럽고 편한 좋은 느낌이긴 했으나, 먼저 들었던 클로즈드 제품들보다 귀에 띄게 좋은 점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1번 청음샵에선 AKG와 필립스 제품들, 2번 청음샵에서는 Final, Grado, Fostex 제품들도 들어보고자 했으나 체력과 시간 문제로 포기하고 나왔습니다.
결론
1. 청음할 때마다 주변 환경이나 청취자의 심리적(+체력적) 요인이 큰 영향을 미친다.
2. 가장 좋다고 알려진 헤드폰을 먼저 들으면(그리고 그것에 만족하면) 다른 헤드폰들은 시시하게 들린다. 고가제품 구매욕구가 커지게 된다. 씀씀이가 커지게 될 위험이 있다.
3. (2와 반대로) 가성비 좋기로 소문난 제품을 먼저 듣고 상위 기종을 나중에 들으면 차이를 미세하게 느낀다. 절약하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4. 오디오 장비는 성능 향상에 따라 가성비는 급격히 떨어진다.(그럼에도 나는 계속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을 못 버린다)
PS : HD 800S가 너무 좋았어요(이것도 이날만의 특별한 느낌일지도 모르겠지만요). G7 직결로도 너무 좋게 들렸습니다. 직결로도 좋은데 그러면 DAC/AMP연결하면 더 좋을지도 궁금해지기까지 했고요. 상대적으로 안 좋게 들렸던 고가 제품들은 과연 앰프 연결로 얼마나 좋아질까도 호기심이 들었네요.
근데 맘에 드는 게 확실히 비싸니까 중간 단계에서 시행착오를 생략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냥 지금 있는 것 잘 쓰다가 나중에 여유 있을 때 한번에 건너 뛰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댓글 32
댓글 쓰기매스드랍발 HD6XX 추천드리고 싶은데 220불로 가격이 오르는 통에 관세와 배송비까지 하면 추천드리기 좀 애매해진...
DT990 pro가 착색은 약간 있잖아요... 저도 저음 댐핑이 좋아서 EDM쪽 들을때는 즐겨 씁니다.
익숙해지셨다면 오픈형 헤드폰은 DT990 pro로 종결해도 훌륭하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더...
5. 결국 구매해서 집에서 들어보면 청음제품과 신상품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운드가 다르게 들린다...ㅠㅠ
ㅎㅎ... 아무리 청음해도 완벽한거는 아니더라는....
이어컵 안에 있는 게 교체 가능한 필터입니다. 총 3가지가 있는데 각 필터에 따라 음색이 약간씩 달라집니다.
말씀하신 내용으로 유추하기엔 노필터나 검정색 필터로 필터링을 최소화 하시는 게 나았을 텐데 아쉽네요.
그리고 감도가 낮은 편이라 앰프를 쓰셨으면 더 맘에 들으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나 다시 들어볼 일이 생기시면 위 사항들을 고려해서 들어보시고, 추가로 EQ 로 125 ~ 500 Hz 영역대를 억제해보시는 것도 권해드립니다.
두 개인게 어디 그것 뿐이겠어욥... 오~싹~~ --;;;
지금도 1770 아주만족하면서 사용합니다 ㅋㅋ
제가 방문했던 시간대가 사람이 적거나 간단히 이어폰을 청음하는 사람이 많더군여.
이어폰샵처럼 배경 노래를 틀어놓지 않아 오픈형 헤드폰을 청음하기 무난한 듯 하나, 소리가 많이 새다보니 음감을 하면서 타인에게 자주 민폐를 끼치지 않았나 생각을 해봤어야 하나 미안해지긴 하더군여.
말씀대로 공간이 좁다보니 청음환경으로서는 좀 별로긴 합니다.
생각해보니 이어폰샵은 그래도 안쪽에 부스가 있어서 일부제품은 조용히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분당선 연장 공사라 공사가 꽤나 걸릴텐데 ㅜㅜ 당분간 온전한 청음은 힘들겠군요.
LCD 시리즈를 폰에 직결해서 들으시면..ㅠ
아마 적당한 앰프 물리면 사뭇 다른 청음을 하실 수 있을겁니다
내리신 결론에 동감합니다.